볼커의 실험: 고금리로 잡은 인플레이션

볼커의 실험 고금리로 잡은 인플레이션

1979년 8월, 미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고, 사람들은 내일의 물가를 예측할 수 없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련 상황에서 폴볼커가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의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은 무려 13%에 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슈퍼마켓에 가면 어제 1달러하던 우유가 오늘은 1.13달러가 되어 있는 식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1년 후에는 우유 한 병에 2달러를 훌쩍 넘길 수도 있었다.

볼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이론을 실제 정책에 적용하는 대담한 실험을 시작했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서나 통화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강물이 넘치는 것을 막으려면 상류에서 물의 유입을 줄여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볼커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시중에 풀린 통화량을 줄이기 위해 금리를 대폭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볼커의 전략은 단순하면서도 과감했다.

그는 마치 과속 운전 중인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강하게 밟는 것처럼 금리를 급격히 올렸다.

1981년 6월, 연방기금금리는 무려 20%까지 치솟았다.

이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은행에서 1,000달러를 빌렸다고 가정해보자.

1년 후에는 1,200달러를 갚아야 한다. 200달러의 이자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친구에게 돈을 빌리고 20%의 ‘친구세’를 내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높은 금리는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주택 시장이 얼어붙었다.

집을 사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30년 고정 모기지 금리가 18%를 넘어서자, 많은 가정에서 집 구매는 꿈도 꾸기 힘든 일이 되었다.

예를 들어, 20만 달러짜리 집을 사려는 가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금리로 계산하면 매월 납부해야 하는 모기지 금액이 거의 3,000달러에 달했다.

이는 당시 중산층 가정의 월 소득을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마치 월급의 대부분을 집에 바치는 것과 같았다.

기업들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높은 금리로 인해 운영 자금을 빌리기가 어려워졌고, 이는 곧 투자와 고용의 감소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한 중소기업이 새로운 기계를 구입하려고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전에는 5% 금리로 100만 달러를 빌려 기계를 살 수 있었다면, 이제는 20% 금리로 같은 금액을 빌려야 했다.

이는 기업의 재무 계획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마치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의 가격이 갑자기 4배로 뛴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많은 기업들이 투자 계획을 취소하거나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실업률도 급격히 증가했다.

1982년 말, 실업률은 10.8%까지 치솟았다.

이는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10명 중 1명이 실직 상태에 놓인 셈이다.

특히 제조업과 건설업 분야가 큰 타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대량 해고의 위험에 직면했다.

공장들이 생산을 줄이거나 아예 문을 닫으면서, 한때 번영했던 공업 도시들은 깊은 침체에 빠졌다.

이는 마치 활기 넘치던 도시가 갑자기 고스트타운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러나 볼커의 고통스러운 처방은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2년 중반부터 인풀레이션율이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3.2%까지 떨어졌고, 이후에도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이는 마치 고열에 시달리던 환자의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과 같았다.

물가 상승세가 꺾이면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달러로 살 수 있는 빵의 양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들도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아져 장기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마치 안개 속에서 운전하던 차가 갑자기 맑은 도로에 들어선 것과 같았다.

기업들은 다시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고, 이는 점차 고용 증가로 이어졌다.

볼커의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단호한 의지였다.

그는 높은 실업률과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정책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쓴 약을 계속 처방하는 것과 같았다.

많은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이 정책의 완화를 요구했지만, 볼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단기적인 고통이 장기적인 경제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었다.

마치 암 환자가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견디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볼커의 접근법은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이론과 정확히 일치했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이 “너무 많은 돈이 너무 적은 상품을 쫓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마치 많은 사람들이 한정된 수의 콘서트 티켓을 사려고 경쟁하는 상황과 비슷했다.

볼커의 고금리 정책은 바로 이 “너무 많은 돈”의 공급을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이는 마치 과속 주행 중인 자동차의 연료 공급을 줄이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볼커의 실험은 통화주의 이론의 실효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그의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성공적으로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수십 년간 미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마치 오랜 질병을 앓던 환자가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거쳐 완전히 회복된 것과 같았다.

볼커의 정책이 가져온 또 다른 중요한 결과는 연방준비제도의 신뢰성 회복이었다.

1970년대 동안 연준은 인플레이션물 통제하지 못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볼커의 과감한 정책과 그 성공으로 인해 연준은 물가 안정을 지키는 강력한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를 확립했다.

이는 마치 무능한 경찰서장이 교체된 후, 새로운 서장이 범죄를 성공적으로 퇴치해 시민들의 신뢰를 얻은 것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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